공지사항

(속보!) 구바울 원장 소천

  • 작성자 : 홍보실
  • 조회수 : 4,602
  • 06-14

(속보!) 구바울 원장 소천



< 속 보 >
해방 후 한국에 근대의술 도입 ! 한국전 慘禍 속에 불굴의 의술 !
우리나라 기생충 박멸의 선구자 ! 예수병원에서 22년 헌신 봉사 !

전 예수병원장 구바울( Dr. Paul S. Crane) 소천

2005년 6월 13일(월요일) 오전 8시(한국시간) 전 예수병원장 구바울( Dr. Paul S. Crane)이 미국 노스케롤라이나주 블랙마운틴시 자택에서 향년 86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전란과 황폐함으로 환자들이 목숨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보였던 시절, 한국전쟁의 공포가 가득한 그 한가운데서 위험에 굴하지 않고 밀려드는 수많은 환자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던 의사가 있었다. 구바울( Dr. Paul S. Crane), 불굴의 의지로 황폐화된 예수병원을 2번씩이나 부활시키고, 간호학교를 세워 근대 간호 프로그램을 도입하였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수련의 제도를 도입하여 대한민국 의료사의 한 획을 그었다.
나병환자를 내 몸같이 돌보았으며 기생충으로 목숨을 잃은 어린아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어린이들이 기생충 박멸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등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끝없는 정열을 불태우며 무려 22년 동안 예수병원에서 의술로 헌신 봉사하였다. 1965년 6주간 미국 남부 순방하며 한국과 예수병원 사정을 널리 알려 1965년 미국남장로교 여전도회 생일헌금 40만 달러 헌금를 모금하고 호남 최대의 현대식 예수병원 건물의 설계도를 설대위 원장에게 넘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예수병원은 6월 17일(금) 아침 7시 50분 고 구바울 병원장 추모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으며, 김민철병원장과 병원관계자들은 미국을 방문하여 유족들을 위로하기로 하였다.


故 구바울( Dr. Paul S. Crane) 병원장 발자취 - 무한 사랑의 꿈, 그 불굴의 드라마

황폐한 예수병원에 도착

구바울( Dr. Paul S. Crane) 원장은 1919년 미국 아틀란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한국 선교사 인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유니온 메모리얼 병원 등에서 의사로서의 수업을 쌓은 후 1947년 일제하 신사참배 거부로 8년 동안 강제 폐원이 되어 지붕과 벽만 있던 황폐한 예수병원에 도착하였다.
일제의 억압이 극에 달했던 1940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예수병원이 폐원되고 선교사들 마저 추방을 당했던 당시 전주는 20만 인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술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45년간 권위적인 일본의사들이 갑자기 귀국하자 한국, 특히 호남지방은 의료의 불모지로 변해있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소문

외과의사인 그는 병원 재개원 이전 임시 수술실에서 빈약한 수술기구로 당시 서문교회 김 세열목사의 담낭염을 수술하였고 그는 10일 만에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죽은 사람도 기적같이 살린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1948년 1월 재개원 당일에 입원 환자가 꽉 차고 넘쳐날 정도였고 응급수술이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나병환자를 내 몸 같이, 우리나라 최초 수련의 제도 도입

그는 한 달에 한번은 순천 애양원을 방문하여 나병환자의 상처 치료법과 수술 등 정성으로 치료하고 돌보아 주며 그들 서로를 돕도록 가르치고 격려하였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의사 수련의 훈련과정을 도입하여 체계 있는 의료 교육을 통하여 수많은 기독의사를 양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0년에는 간호학교를 완공하여 간호 프로그램의 대계를 세웠다.

한국전쟁의 공포, 밀려오는 환자들을 껴안다.

1950년 한국전쟁, 북한군에 허겁지겁 쫓겨 가던 환자들이 절망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예수병원은 일상 업무를 계속하였다. 온종일 넘쳐나는 수술환자, 총상환자, 중환자의 수술과 치료에 전념을 다할 뿐이었다. 전쟁소식은 점점 더 나빠져 갔고 예수병원은 한국에서 전방 군 병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이 논산까지 올 때까지 환자들의 안전한 피난을 위해 노력하였고 끝까지 마무리를 한 후 맨 나중에 빗발치는 총알을 피하며 부산으로 극히 위험한 피난을 떠났다. 1050년 10월 전세가 호전되자 예수병원으로 온 그는 곧바로 입원병실을 가동, 병실은 총상환자와 응급환자로 가득 찼다. 그 후 중공군에 밀려온 피난민 홍수로 남쪽 인구가 배로 증가한 가운데 밀려오는 위암환자, 자궁암, 자궁외 임신, 절단수술에 밤을 새워야 했다.

군의 내규까지 바꾸는 뜨거운 정열

1954년 비바람이 심한 밤, 한국해군 한명이 총에 맞아 혈압도 없고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의사도 없어 조금 후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헬리콥터로 날아가 총 맞은 곳을 열어보니 대동맥이 파열 환자였다고 한다. 그는 재빨리 손가락으로 대동맥을 틀어막고 수혈을 시작, 혈압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손가락을 서서히 빼면서 파혈된 혈관을 꿰매었다. 그 환자는 상당히 빠른 회복을 보여 목숨을 구했다. 당시 군의 내규는 팔다리의 동맥이 파열된 경우 절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그는 상한 동맥을 꿰매 올라가는 수술로 팔 다리를 자르지 않고 수술하였고 그로 인하여 군의 내규도 바뀌었다. 그 후 그는 한국군 고문단에서 고문으로 위촉, 전용 비행기를 내주어 군의관 지도, 한국말 유창하니 대화도 잘되고 교육도 더욱 좋았다.
그는 서울 군 병원에 배속되어 군복무 중 1957년 11월 260명이 탄 군 수송기가 추락한 대형 사고가 발생하여 모두가 수술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그를 비롯한 의사들은 3일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수술하고 치료하여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그 중 20명만 사망하였다 한다.

기생충 박멸의 선구자

1964년 겨울, 7살 여아의 몸속에서 무려 1,063마리 회충이 나온 수술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코리아 타임즈에 수술광경 사진을 실어 대대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영양분 확보를 위해 이 기생충과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곧 기생충 근절을 위한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니면 기생충 근절을 위한 투약, 강의, 학교에 기생충 박멸 운동을 전개하였다. 캠페인 시작 4년 후에 34%, 1986년에 4%로 격감하였다. 그는 한국 기생충 박멸 협회 설립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기생충 근절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국민훈장 받았다.

연간 1,500명 세례교인

1961년 그는 전도사 2명과 함께 선교에 힘쓰면서 전도회를 조직하고 직원 급여의 1% 헌금으로 시골전도와 농어촌 무료진료를 시작하였고 년간 1,500명이 세례교인되기를 결심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가교 역할까지

한국에서 자라 한국말에 능숙한 그는 1961년 5월 박정희 케네디 정상회담 통역으로 초청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라도 사투리를 재미있게 구사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동안 흐뭇한 대화를 나누고 워싱턴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한다. 그 후 4차례 정상회담 통역을 담당하였다.

예수병원 확고부동한 명성

예수병원은 그 후로 ‘치유의 집’이라는 확고부동한 명성을 얻게 되고 입원실이 부족할 지경이었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와서 부근여관이나 병원 계단 등에서 입원실이 비길 기다렸다. 1965년 6주간 미국 남부 순방하며 예수병원 사정 알려 1965년 미국남장로교 여전도회 생일헌금 40만 달러 헌금를 모금하여 1972년 호남 최대의 현대식 예수병원 건물의 설계도를 설대위 원장에게 넘겼다.

무한 사랑의 꿈, 그 불굴의 드라마

1969년 만 22년을 분투, 노력한 예수병원에서 은퇴한 후 미국의 퇴역군인 병원에서 봉사하던 그는 1998년 ‘예수병원 100주년’ 때 자녀, 손자손녀 20명과 함께 예수병원에 와서 50년 전 상황과 크고 아름다운 호남이 대표적인 병원으로 발전된 것을 보고 감회에 젖었다.
그의 부친은 1912년 전남 순천에서 매산학교를 설립하여 일본의 압제 하에서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과 선교를 위해 헌신한 구례인(John Crane)으로 한국 기독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교사 가족이다.
구바울은 출생지만 미국이지 출생하여 몇 달 안 되어 한국 친구들과 같이 자라난 사람으로 지칠 줄 모르는 결단력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성품은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였다. 그는 종종 “내 고향 순천”이라고 말했다. 미국 어디가 그의 고향이었겠는가? 그의 고향은 대한민국이었다.

약력
1919년 5월 2일 미국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서 출생
1941년 - 1944년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의과대학 졸업
1944년 - 1946년 유니온 메모리얼(Union Memorial) 병원 인턴 수료
1947년 - 1969년 전주 예수병원장 재직
1958년 국민훈장 무공훈장(대한민국) 수상
1951년 - 1952년 유니온 메모리얼 병원 외과 레지던트 수료
1960년 - 1962년 존스 홉킨스 병원 전임의
1963년 한국시민상(대통령 박정희)
1969년 - 1970년 미국 버트란스 병원 재직
1970년 - 1984년 미국 내쉬빌 밀러 의료대 재직
19882 한미수교 100주년 한미우호협회상 수상

유족
부인: 소피 엠 크레인 (Mrs. Sophie M. Crane)
자녀: 장녀 버지니아, 장남 존 커티스, 차녀 엘리자베스, 삼녀 제네트, 차남 제임스

“고급의료 수준과 자비의 마음을 갖춘 의료인을 양성해서 부나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환자에게 관심의 초점을 두기, 과학적인 의료수준과 환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관심, 이런 것들의 조합이 한국에서 나의 생애의 첫 번째 목표였다.” - Dr. Paul S. Cr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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