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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보 ! - 설대위 박사님 소천

  •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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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22

속 보 ! -  설대위 박사님 소천 속 보 ! -  설대위 박사님 소천

속 보 ! -  설대위 박사님 소천 속 보 ! -  설대위 박사님 소천


<속보!>

전북의 위대한 스승이며 명예 전북도민이신 설대위(미국명 : David John Seel) 예수병원 전 병원장께서 2004년 11월 21일 낮 1시에 미국 알라바마 버밍햄 자택에서 소천하셨습니다.

예수병원 분향소
일시 - 2004. 11. 22(월) - 2004. 11. 27(토),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장소 - 예수병원 1층 예배실

영결 예배
일시 - 2004. 11. 25. 07:50
장소 - 예수병원 1층 예배실



< 속보> 전북의 위대한 스승이며 명예 전북도민이신 설대위(미국명 : David John Seel) 예수병원 전 병원장 소천


- 한국의 슈바이쳐, 그가 우리 곁을 떠나시었다. 미국명 David John Seel 보다 설대위란 한국명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가 늦가을 찬바람이 부는 2004년 11월 21일 오후 1시, 미국 알라바마주 버밍햄 자택에서 아버지를 잃은 듯한 커다란 슬픔을 남겨두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다. 향년 80세 -


설대위 박사의 발자취

한국전 직후인 1954년, 황폐한 대한민국의 전주, 예수병원에 첫발을 내디딘 훤칠한 키와 수려한 용모의 청년 의사 설대위는 북한군의 죽창에 어깨를 깊이 찔려 팔을 절단해야만 했던 농부를 6시간의 대 수술로 팔을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설대위 박사의 손을 부여잡고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며 퇴원한 그는 며칠 후 찐 감자를 한 아름 갖고 왔다. 당시 그는 전쟁 후 폭발물 환자, 굶주림에 기력을 잃은 아이, 무수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느라 수많은 날들의 밤을 새워야 했다. 환자들이 몰려와 여관이나 병원입구 계단에서 입원실이 빌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진찰실은 항상 만원이었지만 매일아침 일과는 온 병동을 울리는 기쁨의 찬양으로 시작되었다. 1958년에 그를 돕던 부인 설매리(Mary Batchelor Seel)는 과로로 심각한 요통을 얻게 된다.

1925년 4월 미국플로리다 브래덴톤에서 출생한 설대위 박사는 북장로교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남미의 칠레와 콜롬비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다. 15세때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48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안스 튜레인 의과대학 졸업하고 이듬해 설매리 여사와 결혼하고 의료선교사 활동을 결심한다. 1953년 선교사로 임명된 설대위 부부는 첫아들 존 실(John Seel)과 함께 제2의 고향이 될 이역만리 전주에 도착하게 된다.

그로부터 36년간 그리스도의 따스한 손길로 환자를 감싸 안아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인자한 의사였으며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피폐한 전주에서, 예수병원에서는 탁월한 능력의 경영자로서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헌신과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슈바이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 50-60년대 무당과 민간요법으로 몸을 망친 수많은 암환자들이 뒤늦게 예수병원을 찾아오는 안타까운 참상을 겪으면서 몸소 피고름을 짜내면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수많은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한편 그는 1964년 우리나라 최초로 암환자 등록사업을 시작한 후 대한 두경부학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며 우리나라 암환자 치료와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며 우리나라 암치료 의료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된다.

“종을 울려서 모두에게 알리시오” 1969년 예수병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미국과 독일에 신청한 원조가 승인되었다는 전보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당시 호남 최대의 현 예수병원 건물은 그가 심혈을 기울인 첫 번째 작품인 것이다. 올해로 106년을 맞이한 당시로서는 매머드급 병원인 예수병원의 굳건한 토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1970년대 의료혜택에서 소외되었던 오지 농촌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여 완주군 소양, 동산, 용진, 고산에 의료 보건사업을 실시한다. 지역사회 보건의사, 보건전문 간호사, 마을 건강요원 등 새로운 의료인력을 훈련시키는 등 농촌보건 사업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의료시설이 열악한 농민의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의 건강을 돌보는데 앞장섰다. 1986년에는 예수병원 기독의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신앙과 과학을 접목한 의학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현시켰다.

그는 환자를 병자로서가 아니고 한없는 자비와 인자함으로 육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감싸 안으시던 뜨거운 어머니의 마음 그 자체였다. 또한 불굴의 의지로 예수병원을 건축하고 호남 최고의 의료원으로 키워내었으며 언제나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원칙에서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몸소 보여준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모든 환자를 예수님 대하듯 하라.” 이는 그가 환자를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였으며 또한 그가 36년간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수백의 후배 의사들에게 당부한 십계명 중의 하나이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에게 더 존경을 받으시면서 고귀한 인품과 품격으로 한없는 찬사를 받으시면서 언제나 겸손과 소박함으로 그를 아는 사람들의 삶과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그로부터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환자들이 그를 다시 찾아와 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하고 당황한 그가 황급히 그들을 안아 일으키는 장면은 그의 지극한 사랑 자비로운 인품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며 옆에 있었던 우리에게는 따스한 마음과 훈훈한 미소를 머금게 하였었다. 요즈음 세상에 다른 그 누구가 있어 그와 같은 최상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뜨거운 정열과 그의 새파란 젊음의 전부와 전 생애 모두를 송두리째 이곳에 헌신하였다. 1990년, 푸른 꿈을 꾸던 청년 의사 설대위는 모든 소망을 이루고 이제 노신사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황페화된 시절 우리나라에 바다 보다 더 큰 사랑을 가슴에 품고 전주에 왔던 젊은이는 의사로서 선교사로서 모든 꿈을 이곳에서 이루고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선진국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을 뒤로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까지도 예수병원을 위해서는 아낌없는 지원과 기도로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 역을 다하였다. 줄곧 든든한 어른의 위치를 지켜왔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조용한 시골 마을의 노 부부 아담한 집에는 지금도 설대위라는 이름의 문패가 걸려 있다. 미국에서도 그는 대한민국과 전라북도와 예수병원을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한 영원한 진정한 한국인, 전북도민이었다.

1990년 예수병원 이사회는 헌신적인 의료선교 사역으로 대한민국과 예수병원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미국을 떠나는 그를 명예 예수병원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그 후 수차례 예수병원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을 방문하여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만찬장에서는 굵고 나직한 저음으로 울밑에선 봉선화를 열창하여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호남을 대표하는 병원, 예수병원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와 지역사회에 의료와 선교를 통한 커다란 업적을 남긴 그에게 대한민국은 1976년 국무총리 표창, 1978년 국민훈장 목련장(대한민국 대통령)을 수여하였으며 전라북도는 1997년 전북도민의 날 행사에서 명예 도민증을 증정하였고 그해 한미우호상 수상, 1998년 건국대학교 상허대상 수상(외국인으로는 최초), 2001년 전북일보 “전북을 빛낸 20세기 인물” 50인에 인촌 김성수, 미당 서정주 시인 등과 함께 외국인으로 유일하게 그가 선정되었다.

예수병원을 그리워하며 항상 기도하던 그는 노환으로 투병 중에도 예수병원 암센타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노환이 더욱 중해진 바로 올해 8월에는 남은 힘을 모두 모아 마지막 커다란 선물을 예수병원에 보내왔다. 암치료 장비인 고에너지 선형가속기가 그것이다. 그의 예수병원 사랑을 이처럼 모두를 아낌없이 주는 어버이의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대한민국을 그토록 사랑하셨던 전라북도의 영원한 스승이시며 예수병원의 큰 별이시던 그가 이제 몸은 비록 우리를 떠나시었지만 지금부터 이후로도 예수병원의 영원한 아버지로 일컬어질 것이며, 그가 피워낸 예수병원 그 아름다운 꽃은 마땅히 그와 같이 품격 높은 향기를 드높이 발하게 될 것이며, 그의 인자한 미소와 함께, 예수병원의 이름과 함께 그가 예수병원에 남긴 큰 뜻은 천년을 흘러서 이 땅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사랑하는 설대위 원장님! 예수병원에서 한없이 푸르던 무한사랑의 꿈을 고이 접으시고 이제 주님의 품안에서 더 큰 평안을 누리소서 -


약 력
1925 미국플로리다 브래덴톤에서 출생
1948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안스 튜레인 의과대학 졸업
1948-53 뉴올리안스 체리티 병원 외과 레지던트 수료
1958-60 뉴욕 메모리얼 병원 종양외과 레지던트 수련
1954-90 미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지원, 36년간 예수병원에서 인술을 펼침
1961 예수병원에 종양진찰실 개설
1963 한국 최초로 암환자 등록사업 시작
1969-87 예수병원장 역임
1971 완주군 소양, 용진, 동산, 고산에 농촌보건 사업 실시
1976 국무총리 표창
1978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대한민국 대통령)
1981 소아마비 퇴치사업 전개(50만명에게 예방접종)
1984 대한두경부학회 창립 및 초대회장 역임
1986 기독의학연구원 설립
1990 예수병원 명예원장 겸 재미업무 담당
1997 전라북도 명예도민증 증정
1997 한미우호상 수상
1998 건국대학교 상허대상 수상(외국인으로는 최초)
2001 전북일보 “전북을 빛낸 20세기 인물” 50인 선정 (외국인으로 유일)

유 족
부인 : 설매리(Mary Batchelor Seel)
장남 : 존 실 2세(John Seel, 51세) 작가, 대학교 교수
장녀 : 제니퍼(Jennifer, 49세) 교사
차녀 : 크리스틴(Christine) 의과대학 교수

저 서
1975 아버지는 내 아픔을 아시는가?
1997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 (옮긴이 : 김민철(현 예수병원 병원장))
1998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옮긴이 : 김민철(현 예수병원 병원장, 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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